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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미궁속의 사건보도, 그 이후]41년 한(恨) 서린 유언, "살인범님! 비밀보장 할테니 내 아들 암매장 장소 제발 가르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국가, 언론, 이젠 고향 '대구'서도 외면받는 실종된 서울대 법대생 노진수 사건...노모의 생전 마지막 절규

뉴스노믹스 최대억 기자/탐사보도 국장 겸 유라시아탐사본부장 |

 

본보의 "40년전 사라진 서울법대생의 노모, '죽기전, 범인 용서합니다. 제발 내 아들 마지막 장소 어딘가요?'(2022년 9월21일 1면)" 보도 이후 147일째인 15일 오전(조금전) 故노진수의 둘째형인 노진호(대영)씨가 필자를 다시금 찾아왔다.

 

미궁 속 사건에 '한 가닥'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고 필자를 재차 찾은 이유를 설명한다(편집없이 진행된 하단 인터뷰 풀영상 컷 참조).


우선 그는 자신의 어머니 최소선(92)씨 병세가 악화돼 임종을 앞둔 상황을 말해주기 위함이고, 또 어머니를 대신해 느즈막에 강조했던 유언을 꼭 전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노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 이후 중환자실 면회가 금지됐기 때문에 병원에서 제공해 주는 영상으로만 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영상 속 노씨의 어머니는 앞서 접했던 노진수를 향한 40년째 한맺힌 통곡은 사라졌고, 이젠 의식을 잃고 앙상한 뼈만 남아 힘없는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첫번째 동영상, 하단). 

 

故노진수의 어머니 최소선씨가 의식을 잃은채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

 

지난 9월 만남에선 정상적인 소통은 어려웠으나, 그나마 거동이 있었고 드문드문 대화가 가능했다.

 

노씨는 "(어머니가)며칠 남지 않은 것 같은데(중략), (노진수 마지막 데려간)세 분들중에 한 분이라도 계시면 최대억 기자(필자)에게 이메일(predesk@thenewsnomics.com)로 하면, 절대로 비밀을 보장하고 당신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 (어느 곳에)암매장했는지 그것만 알고 싶을 뿐이다"고 호소했다(두번째 동영상, 하단).

 

  故노진수의 둘째형 노진호씨가 어머니의 병세를 설명하며 노진수 사건 가담자에게 양심선언을 호소하는 모습

 

이날 노씨는 본지와 별도 인터뷰에서 "아마도 내 동생에게 해를 가한 사람(당시 청장년 추정)도 세월지나 가족을 구성했을 것이며 그 소중함을 알 것이라 본다"며 "살해했다면 당사자로서 이름 석자 '노진수'는 분명히 기억하리라 본다. 그리고 평생 살아가며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 내 동생 이름 한번쯤은 검색했으리라 짐작한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의 마지막 영상을 보시고 꼭 연락달라. 마지막 끈을 놓기 전, 내 동생 (노)진수를 암매장한 사람들의 양심선언을 간절히 바라고 또 부탁드린다"며 "비밀은 반드시 보장할 것이며, 법적 책임을 절대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서울대 인근, 요즘으로 치면 호프레스토랑 격인 '반야성' 술집에 진수가 자주 드나 들었다고 해서 41년전 진수 실종 며칠뒤 어머니와 찾아간 적이 있다"며 "그곳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정보기관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들과 서울대 출입 형사들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고 하더라. 당시 한 여종업원이 진수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다. 그땐 경황이 없어 그 여성과 만나지 못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 꼭 (최대억 기자 이메일로)연락바란다"고 당부했다.  

 

노진수의 어머니 최소선씨는 3남1녀의 자녀를 뒀다.

 

장남 노진학은 1970년 대구 모 중학교 3학년때 유리창을 닦던 중 교정 바닥에 떨어져 숨졌다.

가족들은 안전장치 부실 등 학교 측의 관리 소홀 등 혐의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행여나 청소중에 누군가 실수 또는 의도적으로 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했지만 수사는 유족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노진학은 중3때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문장 능력이 뛰어나 당시 3대 중앙지 중 한곳에서 신춘문예 수필 부문(제목:우리 엄마 최고)에 당선된 인재였다.

 

가족들은 소송 과정에서 가세가 기울고 빚독촉에 시달렸다. 

 

이에 세째 아들 노진수는 형의 죽음을 두고 "힘없는 사람은 당하고만 살아야되냐"며 가족들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노진수는 이후 법대에 가서 억울한 사람을 돌보겠다고 다짐하고 서울대학교 법대 81학번으로 그 꿈을 이룬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 노진수는 외삼촌이 1950년 사상 최대 규모의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사건인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간 이후 흔적없이 사라져 '연좌제'로 판사는 커녕 공무원도 하기 힘들다는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가족은 털어놨다.

 

그는 서울대 법대 1학년 대표를 맡아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촌극을 기획하거나 검은 리본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며 세번 내리 휴학을 했고, 1982년 5월20일(의문사진상규명위 기록) 기거하던 독서실에서 "건장한 세 남자가 찾아와 함께 나갔다"는 독서실 총무의 증언 이후 세상에서 증발했다. 

 

노진수의 실종 전후 일자별 행적(의문사진상규명위 자료)에 따르면 1981년 가을, 광주 출신의 20대 후반 남자와 대구집에 방문한 노진수는 어머니 최소선 씨에게 "겁난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고, 이듬해인 1982년 5월께 고교동창 (당시 경희대 재학중) 자취방을 찾아 불안한 심경의 편지를 남겼다고 기록돼 있다.

 

아버지 故노금백씨는 평생 아들을 그리워하다 실종 6년뒤(1988년) 세상을 떠났다.

 

최소선씨는 이렇게 남편과 수재에 가까운 자식 둘을 잃었다.

 

지금은 딸 노순옥(68), 둘째 노진호(65)씨 등 이렇게 셋이 남아 지금껏 노진수의 장례식도 치르지않고 한가닥 희망을 져버리지않은채 살아온 것이다. 

 

필자는 현직 판·검사, 변호사, 관료출신, 정치인, 언론인 등 노진수와 서울대 같은 과 입학동기 및 선후배 등을 대상으로 실종관련 추가 단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1982년 5월 실종 시점을 전후해 당시 보안대에서 현역으로 군복무했던 A씨(1981년 1학기 휴학 후 입대, 1983년까지 복무)의 현 소재(경북 울진 임시거주)를 파악, 노진호씨와 동행하며 전화 통화 또는 문자 메시지 발송, 방문 등 접촉을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꺼리며 회답이 없는 등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실정이다.

 

A씨는 앞서 2021년12~2022년1월 사이 필자와의 수차례 만남에서 보안사 현역 근무시절(1981~1983년) 여럿 형태의 고문 현장을 직접 지켜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노진수 사건에 가담한 관계자 및 살인범은 필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족의 뜻에 따라 필자에게 이메일(predesk@thenewsnomics.com)로 연락바란다. 앞서 유족의 뜻대로 비밀 절대 보장한다. 

 

#이하 노진수 사건관련 자세한 내용은 본지의 지난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단독영상]40년전 사라진 서울법대생의 노모, "죽기전, 범인 용서합니다. 제발 내 아들 마지막 장소 어딘가요?" (thenewsnomics.com)

 

            故노진수의 어머니 최소선씨가 의식을 잃은채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

 

    故노진수의 둘째형 노진호씨가 어머니의 병세를 설명하며 노진수 사건 가담자에게 양심선언을 호소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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