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바로 ‘신용대사면’ 혹은 ‘채무자 구제’ 공약이다.
이명박 정부의 720만 명 구제부터 최근 이재명 정부의 113만 명 지원까지, 역대 정부가 호기롭게 내건 채무조정 대상자만 합산해도 무려 13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활동 인구의 절반 가까운 수치다.
그러나 나라살림연구소의 분석 결과는 참혹하다.
지난 20여 년간 실제 채무조정이나 소각의 혜택을 받은 인원은 약 120만 명으로, 공약 대비 단 9%에 불과했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약속은 간데없고, 초라한 성적표만 남은 이면에는 국민의 눈을 속이는 정치적 재포장과 도덕적 해이라는 낡은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권마다 새로운 기금 이름을 내걸지만, 그 실질은 이전 정부가 처리하지 못한 채권의 재활용이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의 신용회복기금은 박근혜 정부의 국민행복기금으로 이름을 바꿨고, 여기서 처리되지 못한 채권은 문재인 정부를 거쳐 이재명 정부의 새도약기금으로 고스란히 이관됐다.
실제로 최근 출범한 이재명 정부 새도약기금의 1차 매입분 5.4조 원 전액이 이전 정부들이 남긴 잔여 채권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로운 사람을 구제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뀌었으니 간판만 새로 달고 성과를 가로채는 실적 부풀리기가 반복된 셈이다.
이러한 반복의 굴레 속에서 이재명 정부 역시 과거의 실패한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중히 지켜보아야 한다.
새도약기금이라는 이름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그 출발이 구기금 채권의 흡수와 재포장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결국 국민을 향한 또 다른 눈속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7만 명에 대한 1차 소각을 시작으로 실적을 쌓아가고 있으나,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규 구제인지 아니면 장부상의 숫자 놀음인지는 향후 정책 집행 과정에서 철저히 검증돼야 할 과제다.
배드뱅크 정책이 매번 용두사미로 끝나는 이유는 도덕적 해이 논란을 의식해 진입장벽을 지나치게 높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빚을 깎아주면 성실 상환자가 박탈감을 느낀다는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까다로운 조건을 덧붙였다.
돈을 빌려준 금융권의 판단 실패라는 채권자의 책임은 묻지 않고 오직 빌린 사람의 도덕성만 따지는 비대칭적 잣대가 적용됐다.
기업 구조조정에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고용 유지와 산업 보호를 외치지만, 개인의 채무조정에는 유독 가혹한 태도를 보이는 이중 잣대 또한 여전하다.
10년, 20년 넘게 빚을 못 갚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임에도, 이들을 경제활동에서 퇴출된 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나라살림연구소 김진욱 책임연구원은 배드뱅크라는 임시방편에 의존하기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시급함을 역설한다.
김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우선 채무조정 후 신용 복원 경로를 명확히 해 성실 이행자가 조속히 금융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개인회생 변제기간의 유연화와 더불어 파산자의 직업 자격을 박탈하는 각종 법령의 결격 조항을 정비하는 등 사법형 채무조정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기업의 워크아웃처럼 개인도 실제 연체가 발생하기 전, 즉 '연체 우려'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채무조정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김 연구원의 제언이다.
결국 채무조정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망가진 인적자본을 복구하는 사회적 투자다.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화려한 구호 뒤에 숨은 부실한 실적과 재포장의 역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13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영원히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적 수사로만 남을 것이다.
새도약기금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 또한 앞서 지적한 실질적인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는지 국민의 눈으로 끝까지 감시해야 할 때다.










